위대한 생애

남을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자신도 비판을 받는다.

팽나무 2019. 8. 22. 07:13




    제42장. 산상 설교(山上 說敎)(3)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옛 율법을 완성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새롭고

    자비로운 세계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열두 제자들이여! 이것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

    너의 겉옷을 빼앗아가는 자에게

    너의 속옷까지 주어라.

     

    로마 군인이 이 킬로미터를 걸어가라고 하면

    자진하여 이 킬로미터를 더 걸어가 주어라.

     

    강압적인 명령으로 너에게 그의 방패와 장검을 들고

    뙤약볕의 길을 걷게할 때라도 순종하여라.


    교훈을 듣고 있는 열두 사람의 얼굴이

    이해의 기쁨으로 빛났다.

     

    여기에 참된 자유가 있다.

    요구하는 이상의 것을 남에게 준다.


    아낌없는 봉사가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전체에 흐르는 참신한 교훈인 것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힘과 기쁨이 더하여 감을 느꼈다.

    예수님의 교훈은 점점 나아가서 소위

    황금률(黃金律)이라는 교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그대로 남을 대접하여라”(눅 6:31).

     

    이와 비슷한 교훈은 많으나

    예수님의 교훈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은 없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빌리라는 사람에게 빌려주어야 한다.

     

    옛 율법은 벗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일까?

     

    그 후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이 놀라운 명령에 대하여 논란을 거듭해 왔다.

    사람이 어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각국어로 번역된 표현은

    예수께서 사용하신 참 뜻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아람 갈대아계(系) 말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다.

     

    필로스(pilos)와 아가페(agape)이다.

     

    이 두 가지 말은 뜻이 매우 다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는 그 둘 모두를

    “사랑”이라는 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 는 교훈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가끔

    그리스 말의 아가페라는 강한 말로 표현하셨다.

     

    이 말의 뜻은

    ‘모든 인간을 당신의 아들로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편견과 사심(私心)을 버리고

    자신을 억제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수를 애정을 가지고 얼싸안는

    그런 심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원수의 행복과 구원을 빌며

    그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은 예수께서 사용하신 말이 정확하였기 때문에

    열두 제자는 철저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와 같은

    명확한 표현으로 예수께서는 외식(外飾)을 경고하셨다.

     

    선행을 하였어도 자랑하며

    남의 칭찬을 받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선행의 보상은 남들의 칭찬으로써

    이미 받은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숨어서 기도하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이 거리 모퉁이에 서서

    여러 날 동안 금식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초췌해진 표정을 짓고 나 좀 보라는 듯이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들은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이며

    또 자신의 격정(激情)을

    어떻게 억제해야 할 것에 대한

    그분의 교훈도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은 세인(世人)에게 보여준

    생활의 지표이며 행동규범이다.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남을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자신도 비판을 받는다.


    남을 비판하면 반드시 그 비판이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남을 용서하면 자기도 용서를 받는다.

    이것은 각자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도덕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일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남의 작은 허물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의 큰 허물을 고치기에도 바쁠 터이니까,

     

    형제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


    이 교훈은 예수께서 소년시대에 말씀을

    명상하면서 깨우치신 교훈으로서

    이 산상수훈에 나온 것이다.

     

    영적(靈的) 생활의 귀중함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교훈을 한다는 것은 허사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어서는 안 된다.

     

    또 거짓 스승들을 조심해야 한다.

    양의 가죽을 쓴 이리가 적지 않다.

     

    나무의 좋고 나쁨을

    그 열매로써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은 그 행실로 알 수 있다.

    거짓 스승도 그 행실로 탈을 벗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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