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애

무엇을 원하느냐?(2)

팽나무 2018. 11. 6. 21:37





    제24장. 무엇을 원하느냐?(2)

     

     

    “내가 그에게 물로 침례를 줄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분의 위에 내리시는 것을 보았소.”

    요한이 증언하였다.

     

    “그분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침례 요한의 말은 심금을 울려주는 바가 있었다.

     

    이 날 아침 안드레와 요한처럼 기묘한 운명에

    직면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물을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린 어부였다.

     

    그들은 덧없는 세상살이의 번민과

    참담한 인생행로의 무거운 짐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다.

     

    철학자도 아니요 신비주의자도 아니었다.

    진리보다도 하루하루의 생활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가버나움 호반에서 괴로운 살림에

    쪼들려 온 현실적인 청년들이었다.

     

    그렇던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 온 생활에 무슨 의의가 있는가?’

    라는 의혹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침례 요한은

    그들에게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갈릴리에 돌아가서

    정직하게 일을 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저기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 말은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두 청년에게

    삶의 의의를 알려면 저분을 따라가서

    배우라고 격려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 앞을 지나

    베다니의 볕이 내려 쪼이는 네거리를 건너고 계셨다.

     

    두 사람은 마음을 조이며 희망에

    빛나는 두 눈을 번득였다.

    그분의 경쾌한 뒷모습을 좇아갔다.

    뒤를 좇아오는 걸음 소리에

    그분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보셨다.

     

    그리고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셨다.

    그들의 눈에 비추인 예수께서는

    몸은 마르고 창백하시나 단단한 체격의

    삼십 전후로 보이는 청년이셨다.

     

    금빛 짧은 수염에 밤색 머리가 늘어져 있고

    잿빛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그리스도께서는 안드레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웃음 띤 얼굴을 요한에게로 향하며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느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을 맞아주시었다.

    그들은 실망과 낙담으로 절망에 빠진 자신들의 심중을

    그분께서 꿰뚫어 보시고 계심을 느끼었다.

     

    때는 봄으로 장마는 걷히었다.

    풀 수 없는 의문을 품고

    그들은 먼 길을 허둥지둥 찾아 온 것이다.

     

    인생이란 살 보람이 있는 것이냐?

    목적도 의의도 모르는 세상에서

    뼈골이 빠지도록 일하다가 죽어야 하느냐?

    이 슬픔과 번민의 축적이 인생의 전부이냐?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께서는

    이 성실한 청년 안드레의 운명을 내다 보셨다.

     

    훗날 그는 러시아와 그리스에 복음을 전하다가

    안드레 십자가 틀에 Ⅹ자로 묶여

    그리스의 파트라에서 순교할 것이다.

     

    요한(John Apostle)은 장차 노경에 이르러

    신비로운 환상을 보고 요한계시록을 쓸 것이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서슴없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

     

    자신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순방할 계획이다.

    그들 두 사람이 품고 있는 그런 의문에

    대답을 주기 위해 가는 곳마다

    거리에서 설교를 할 예정이다.

    그런데 조력자가 당장 필요하다.

     

    그러나 열을 냈다가 바로 식어버려

    떠나갈 사람은 원치 않는다.

    쉽게 결심하는 사람도 필요 없다.

    확고한 결심의 사람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이 사명을 위한 협력자로

    택하기 전에 충분히 토론하고 협의하여야 할 것이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의심되는 점은

    무엇이든지 풀도록 해야 한다.

     

    충분히 생각하여

    논리적인 납득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덮어놓고 믿으라는 흐리멍덩한 태도는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여가를 이용하여 적당히 돕겠다는

    태도가 아니고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 전체와 심령까지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그런 후 그분의 사명에 대한 신념과

    결심이 섰을 때에는 그들을 동지로 삼을 수 있고

    또 동지를 더 구하도록 한다.

     

    이러한 요구에

    그 어부들은 이렇게 되풀이하여 물었다.

     

    “선생님(랍비여),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저희는 지금 곧 따라가겠습니다.”

    “따라오너라(와 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동구 밖에 있는

    임시 움막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셨다.

     

    거기서 비둘기가 우는 황혼(오후 4시)부터

    참새가 우는 새벽까지 무릎을 맞대고 얘기하였다.

    요한과 안드레는 예수께서 하시는

    이야기 같은 것을 일찍이 들어 본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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